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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부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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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 1937년 1월에 국가전복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겐리흐 야고다]], [[알렉세이 리코프]],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 크리스티안 라콥스키[* 유일하게 40년대까지 살아 있었지만 1941년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와 함께 우익행위 및 트로츠키주의자로 사형판결이 내려진다.[* 함께 기소된 미하일 톰스키는 체포 전에 자살하였다.] 혐의는 "레닌과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고, [[막심 고리키]]를 독살했으며, 소련의 영토를 제국주의 국가에게 할양하려 하였다"는 누명이었다.[*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쓴 부하린의 재판 전후에 대한 글[[http://lodong.org/board/board.html?%20mtype=view&page=2&bid=3&num=307&seq=1509#FOOTNOTE67|#]]] 사실 부하린에겐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었다. 1936년 2월 즈음부터 부하린은 마르크스의 원고를 얻기 위해 프랑스에 있었는데 이미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아마 스탈린이 날 처형할 거라며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그래서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부하린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고 망명 생활을 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지만 부하린 본인이 "나는 소련이 아닌 국가에서는 살 수 없다"는 식으로 그 권유를 거절해 버린다. 다만 부하린의 프랑스 출장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그 상황 자체가 스탈린이 쳐놓은 함정이라는 말도 있다. 스탈린은 결국 부하린이 소련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고 부하린이 처형당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로 보냈다는 뜻.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부하린은 고문당한 적이 없고 스스로 모든 죄목을 자백했다"고 말했으나 후에 밝혀진 내용으로는 부인과 아들에 대한 위협과 "신체적 영향력 행사"를 3개월 동안 버텨낸 끝에 정신적으로 무너져 허위사실이 적시된 진술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 몰로토프의 주장과는 달리 후일, 심문관에게 구타를 허용하는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부하린의 죄목과 재판에 대한 신빙성으로 인해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재심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하린은 수감된 이후,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협상을 시도하였다. 자신을 결백을 주장하는 편지에서 시작하여 추방시켜주면 반트로츠키 공작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에 못 믿겠으면 [[굴라크]]로라도 보내면 그곳에서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제안, 마지막에 이르어서는 죽일거면 최소한 쏴죽이는 대신에 모르핀으로 자살하게 해달라고 애원하기에 이르었으나 스탈린은 이 모두를 무시하였다. 결국 1938년 3월 15일 부하린은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스탈린이 왜 자신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지 의문을 표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모스크바 인근 콤무나르카 사격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부하린의 아들과 아내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약속을 깨고 [[연좌제|아들과 아내는 물론 이혼한 전아내들까지도 굴라크로 보내버렸다.]] 첫번째 아내는 굴라크에서 사망하였으며 두번째 아내는 살아남았으나 평생 PTSD에 시달려야 했다. 아들과 셋째 아내는 살아남는데 성공했고 부하린의 아내는 당시에는 문서로 남길 수 없어서 암기한 부하린의 유언을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집권기에 공개하기도 했다. 부하린이 혁명동지이자 친우였던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메드베데프 알랙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였다. 코바는 스탈린의 애칭 중 하나이다. 스탈린이 죽고서 그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3개의 편지 중에 하나라고 한다. 나머지 편지는 레닌의 아내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과 스탈린이 전화로 심한 다툼을 벌이자 레닌이 스탈린에게 격렬히 화를 낸 내용의 편지와,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가 '스탈린 당신이 나 죽이려고 암살자 보내는거 족족 잡아뒀소. 자꾸 그러면 나도 암살자를 보내도록 할 건데, 난 딱 한 명만 보내면 끝날 거요.'라고 저항한 내용의 편지였다. 이에 대해 스탈린과 부하린이 개인적으로 계파 투쟁 이전까지는 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하린의 편지 내용 역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지 않은 것"이라는 지노비예프의 유언이나 "날조하는 스탈린 학파" 등의 저서에서 스탈린을 매독 환자, 강도 등으로 묘사하며 조롱한 트로츠키와는 달리 자신을 왜 굳이 죽이려고 하는지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 가깝다는 점[* 다만 스탈린이 절대 권력자로 등극하고 가혹한 집산화와 산업화 정책을 몰아붙인 이후로는 부하린은 스탈린을 두고서 '사람이 아닌 악마'라고 말하는 등 스탈린에 대해 완전히 질려버린듯한 발언을 여러번 하였다.], 스탈린이 저 유언장과 별개로 부하린이 옥중에서 집필한 회고록 "How It All Began"의 원고 또한 잘 보관해 놓고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스탈린에게 부하린에 대한 어떤 감정이 남았기에 이 편지를 간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실제로 부하린은 재판이 끝나고도 완전히 숙청당하기까지 1년 정도 시간이 걸렸으며 그의 유언이나 회고록이 다른 사람도 아닌 스탈린 본인에 의해 잘 보관되어서 후세까지 전해지는 등, 스탈린이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기까지 상당한 심적 갈등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만한 정황증거가 충분히 남아 있다. 당장 레닌의 유언장에 같이 언급된 나머지 인물들과 비교해 봐도 재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처형당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국외로 추방하고 나서도 기어이 직접 암살자를 보내서 담가버린 트로츠키를 보아, 원한과 위협은 절대 잊지 않는 스탈린이 호시탐탐 킬각을 재고 있다가 기회가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보내버린(...) 셋과 달리, 체포하여 언제든지 처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동안 시간을 끈 것은 그간 스탈린의 행보와 비교하면 확실히 이질적이다.] 반면 이혼한 가족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했던 점이나 자살하게 해달라는 부하린의 마지막 요청마저 매몰차게 거부했던 점, 처형 방식의 잔혹성에 대한 기록[* 기록에 의하면 같이 사형된 16명 중 가장 마지막으로 처형하라는 명령과 함께 다른 이들의 처형을 지켜볼 수 있는 의자가 제공되었다.]이 존재하는 등 모순이 존재한다. 레닌과 스탈린 등 혁명가에 관한 연구자로 영미에서 일반 독자 사이에서도 유명한 로버트 서비스는 스탈린이 그 편지를 다시 읽고 떨리는 만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남겼다. 결국 본심은 스탈린만이 알 것이다.[* 어쩌면 둘 다였을 수도 있다. 스탈린이 젊은 시절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스탈린은 의외로 예술가 특유의 섬세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부하린에게 [[양가감정]]을 가진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다.]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복권되지 못한 트로츠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소련은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고 소련 국가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스탈린 시대 이후에도 복권해줄 수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부적절한 해석이다. 소련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은 "퇴보한 노동자 국가", 즉 노동자 국가는 맞지만 좀 망가졌다는 것으로 소련 국가 자체를 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점은 트로츠키 사후 자생적으로 등장한 IST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국가자본주의 국가"로 간주한 것과 비교해도 명확하며, 또한 소련에서 추방당하기 이전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붉은 군대 내 측근들의 쿠데타 제안을 거절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서기장' 스탈린의 정통성은 철저히 부정하고 조롱하지만 (자신이 그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일관적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복권된 1988년, 소련 말기-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도 트로츠키가 복권되지 못한 것은 아무리 개혁파인 고르바초프라고 해도 ([[서기장]]으로 집권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결국은 스탈린으로부터 이어온 소련 전통의 계승자이기에 그 시초인 스탈린의 집권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트로츠키를 용인할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트로츠키는 소련 국가 자체는 전혀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국가를 통치하는 소련 정부의 정당성을 부인했던 것이다.]와는 다르게 부하린은 1988년 복권되었다. 부하린의 부인 안나 라리나는 88년까지 살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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